[IT열쇳말] 수리에 대한 권리 – 수다피플

우리의 장비를 어디에서 어떻게 수리할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전자제품은 홀로 수리하기 쉽지 않다. 부품 수급도 어렵고, 어떤 전자제품은 부품에 맞는 도구가 따로 있는 경우도 있다. 사설 수리업체도 있지만 정품 부품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제조사 서비스센터에서 수리를 받는다. 하지만 대도시에 주거하지 않는 경우 수리 가능한 서비스센터 수가 적어 제품 수리를 맡기는 데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비용 부담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제품을 구입했을 때 우리의 권리는 어디까지 보장되는 걸까. 낯선 고민이다. 어떤 이들은 제품을 구입하면 우리가 해당 제품의 소유권을 가지는 것이므로 제품 수리 역시 우리의 권리라고 주장한다. 제품 수리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른바 ‘수리에 대한 권리(Right to repair, 이하 수리권)’다.

|우리가 제품을 구입했을 때 인정받을 수 있는 권리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출처: 픽사베이>

엉뚱한 주장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수리에 대한 권리를 법제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법안은 ‘수리에 대한 권리 법안(The right to repair act)’ 또는 ‘공정수리법(Fair Repair Act)’이라 불린다. 리디아 브라시 공화당 상원의원은 <와이어드>에 “이것은 소유권에 관한 문제다”라며 “우리의 장비를 어디에서 어떻게 수리할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의 권리를 찾아서

수리에 대한 권리 법안은 전자제품 제조업체가 자사 제품 수리시 필요한 부품, 수리 매뉴얼 등을 제조업체 기반 서비스센터 외 소비자 및 사설 수리업체에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좀더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자. 1998년 미국 의회는 디지털 콘텐츠를 보호하기 위해 ‘디지털 밀레니엄 저작권법’을 제정했다. 이 법에 따르면 전자제품의 소프트웨어는 저작권으로 보호되기 때문에 개인 또는 사설 업체가 전자제품을 수리하거나 개조할 시 제조업체는 저작권 침해를 주장할 수 있다. 문제는 전동칫솔부터 자동차, 트랙터까지 최근 만들어지고 있는 거의 모든 제품이 소프트웨어가 포함된 전자제품이라는 점이다.

|전자제품 수리를 홀로 하는 이들도 많지만, 진입장벽이 있다. <출처: 플리커, Guixing Bai (CC BY-ND 2.0)>

이에 2012년 매사추세츠주에서 ‘자동차 소유자의 수리권 법안(H4362)’이 통과됐고 이후 자동차 외 전자제품 수리에 대한 권리도 보호 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2013년 결성된 ‘디지털수리권연합체(Digital Right to Repair Coalition)’는 DIY 애호가 및 독립 수리기술자, 환경단체, 애프터마켓 등 기술 수리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는 협회다. 이들은 소비자의 권리에 다음 사항이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 정보 : 제품 수리시 필요한 문서, 소프트웨어 및 소비자가 자신의 제품을 직접 수리하거나 신뢰할 수 있는 사람(수리전문가)을 선택할 수 있는 법적 능력

• 부품과 장비 : 제품 부품 및 (수리에 필요한) 도구에 대한 공정한 접근권한

• 수리 및 재사용을 위한 잠금해제 : 제품을 작동시키는 데 필요한 소프트웨어 및 펌웨어 잠금을 해제하고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 재판매 허가 : 소비자는 제품을 구동시키는 데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포함해 자신의 제품을 되팔 수 있어야 한다.

• 수리 가능한 제품 : 제품 디자이너는 제품 개발 단계에서 수리 및 재활용 원칙을 고려한 설계를 해야 한다.

전자제품 수리 매뉴얼을 무료로 제공하고 제품 수리 공구를 판매하는 업체 ‘아이픽스잇(ifixit)’도 수리권 법안을 지지하고 있다. 아이픽스잇은 웹사이트에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수정하고 수리할 권리가 필요하다”라며 “수리 혁명에 동참하라”고 권한다.

|아이픽스잇은 새로운 전자제품이 나오면 제품을 분해하고 자가수리 난이도와 재활용 가능 여부를 알려주기도 한다. <출처: 아이픽스잇 웹사이트 갈무리>

<와이어드>는 “공정수리법이 채택되면 전자제품을 쉽게 수리할 수 있다. 노트북, 텔레비전, 드론, 스마트 냉장고, 심지어 트랙터까지. (컴퓨터)프로세서에 의해 구동되거나 소프트웨어에 의해 제어되는 것은 고칠 수 없는 것 빼고는 모두 수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더버지>에 따르면 워싱턴, 매사추세츠, 버몬트, 뉴욕, 하와이, 일리노이, 아이오와, 캔자스, 미네소타, 미주리, 노스 캐롤라이나, 네브래스카, 뉴햄프셔, 뉴저지, 오클라호마, 테네시, 버지니아 등 17개 주에서 이 법안이 발의됐다.

제조업체는 보안, 안전 문제로 반대

미국수리협회는 제조사가 수리점을 독점 소유하면 수리 비용이 올라가고 서비스 품질이 떨어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사설 수리업체로 수리 산업이 활성화되면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얘기다. 소비자의 선택권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국제 비영리단체 ‘전자프론티어재단(EFF)’의 키트 월시 수석변호사는 성명서를 통해 “(수리권) 법안은 독립 수리점과 시장 경쟁력을 보호하기 위해 중요하다”라며 법안이 도입되면 더 좋은 수리 서비스와 더 저렴한 가격을 제공받을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놨다.

| 사설 수리업체로 수리 산업이 활성화되면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소비자 선택권도 보장 받을 수 있다. <출처: 미국수리협회>

<와이어드>의 기사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수리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소비자에게 한 가지 선택지를 남긴다 : 교체.” 실제로 기기가 고장나면 수리 대신 새로운 제품을 구입하는 소비자들이 많다. 환경단체는 수리가 쉬워지면 새로운 전자제품 구매가 줄어 전자 폐기물의 양이 절감될 수 있다고 말한다.

|수리협회는 전문수리업자들의 이익을 대변한다. <출처: 미국수리협회 웹사이트 갈무리>

반면 제조업체들은 공정수리법을 반대하고 있다. 뉴욕주에서 입법 활동이 특히 활발하게 일었으나 수리권 반대 세력의 막강한 로비활동으로 법안 상정은 쓴잔을 마시게 됐다. <마더보드>는 뉴욕주 로비 기록을 살펴본 결과 애플, 버라이즌, 소비자기술협회(CTA) 등 제품 제조사들이 뉴욕에서 공정수리법 반대 로비를 벌였다고 보도했다.

애플은 제품 수리 자격을 갖춘 기술자들이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애플 전문매체 <애플인사이더>에 따르면 애플은 소비자에게 일관된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또 다양한 하드웨어 플랫폼을 제어하고 보호하기 위해 공식 수리 서비스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제조업계는 지적재산권 보호, 정보 보안, 소비자 안전 등의 이유로 수리 관련 정보를 공개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수리가 손쉬워질수록 해킹도 쉬워진다는 것이다. 또 제조업체 주장대로 일반 소비자가 자가수리를 하다 안전사고가 발생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사설업체 사용 이력, 불이익으로 남고 있어

지난 2017년, 애플은 아이폰 배터리 노후화에 따라 기기 성능을 고의적으로 제한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애플은 사용자를 위한 조치였다는 해명을 내놓고 배터리 교체 가격을 인하하기로 했다. 그러나 <IT조선>의 2018년 1월4일 보도에 따르면 애플 공인 서비스센터가 아닌 사설업체에서 아이폰 배터리 교환이나 액정을 수리한 소비자 제품은 아이폰 ‘배터리게이트’로 인한 보증 수리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애플 ‘배터리게이트’는 수리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쓰이게 됐다. <출처: 애플>

미국수리협회는 애플 배터리게이트에 대해 “(애플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아이폰 성능 저하) 문제는 배터리를 교체함으로써 해결된다. 애플이 사용자나 사설업체에는 제공하지 않는 배터리다”라고 지적했다.

외신들은 애플 배터리게이트가 수리권 운동에 다시금 불씨를 지필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에는 테크 기업의 요람이자 애플 본사가 자리잡고 있는 캘리포니아주에서도 수리권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지난 3월7일(현지시간) 수잔 탈라만테스 에그먼 캘리포니아주 하원의원은 수리권을 보장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캘리포니아주는 전자제품을 구매하면 제조업체는 제품 보증기간과 상관없이 제품 제조일로부터 최소 7년 동안 제품을 수리할 수 있도록 필요 부품을 제공해야 한다고 법적으로 명시해두고 있다. 다른 주에 비해 수리에 대한 권리를 좀더 보장하고 있는 곳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수리권이 법제화될 수 있을지 여부는 미지수다.

이 글은 ‘네이버캐스트→테크놀로지월드→용어로 보는 IT’에도 게재됐습니다. ☞‘네이버캐스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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